[곽세연의 프리즘] '살기위한' 달러펀딩에서 '판을 바꾸는' 나스닥으로
  • 일시 : 2026-06-25 13:00:01
  • [곽세연의 프리즘] '살기위한' 달러펀딩에서 '판을 바꾸는' 나스닥으로



    (서울=연합인포맥스) 자본이 국경을 넘나드는 길목에는 언제나 시대를 바꾼 결정적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81년, 정부가 '자본시장 국제화의 장기계획'을 세상에 내놓은 뒤 문은 단계적으로 열렸다. 1985년 12월, 삼성전자가 유로달러시장에서 2천만 달러 규모의 해외전환사채(CB)를 공모 발행하며 대한민국 기업 최초의 해외 조달 이정표를 세웠다. 뒤이어 대우중공업, 유공, 금성사, 새한미디어가 줄지어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까다로운 규제를 피해 유로달러시장의 문을 두드리던, 자본의 변방에 서 있던 한국 기업들의 눈물겨운 개척기였다.

    자본시장 개방의 역사는 곧 '달러를 향한 갈증'의 역사이기도 했다. 1992년 제한적으로나마 외국인의 국내 증시 직접 투자가 허용되면서 물꼬가 트이더니, 1994년에는 마침내 세계 금융의 심장부인 뉴욕 증권거래소(NYSE)의 문이 열렸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3억 달러 규모의 주식예탁증서(DR)를 발행하며 최초로 뉴욕에 상장한 사건은 상징적이었다. 국내 주가보다 프리미엄이 붙은 공모가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영국의 브리티시 스틸에 이어 세계 철강업계 두 번째라는 타이틀은 대한민국 제조업의 위상을 공인받는 계기가 됐다. 뒤이어 한국전력과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각각 뉴욕과 런던으로 향하며 미국주식예탁증서(ADR)와 해외주식예탁증서(GDR)의 대항해가 시작됐다.

    그 시절 해외 증시 상장은 단순히 '저렴한 비용으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통로'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우량 기업임을 인정받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꽤 오래전 자본시장 개방사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쳐 든 것은, 최근 산업과 금융시장을 통째로 흔들고 있는 SK하이닉스의 ADR 발행 소식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SK하이닉스는 현대전자 시절부터 유독 해외 DR 시장과 깊은 인연, 혹은 질긴 업보를 지닌 기업이다.

    벼랑 끝에 몰렸던 기억이 선연하다. 1999년 현대전자 시절 1천200억 원의 GDR 발행으로 숨을 고르던 회사는, 2001년 하이닉스반도체로 간판을 바꾼 뒤, 회사 운명을 걸고 1조6천억 원 규모의 사상 전례 없는 GDR 발행을 감행했다. 당시의 성공은 단순한 자금 유치가 아니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파산이라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던 기업 구조조정 역사에서, 유동성 위기의 숨통을 틔워준 극적인 기사회생의 신호탄이었다.

    그렇게 피와 땀으로 룩셈부르크 증권거래소에 뿌렸던 GDR 씨앗은 시간이 흘러 본주로 전환되거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거래소에서 프리미엄을 받고 거래되는 우량 자산이 됐다. 장기 투자 성향의 글로벌 펀드들이 하이닉스의 든든한 우군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때 구축된 해외 투자자 저변 덕분이다. 과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던졌던 승부수가, 2026년 지금 펼쳐지는 거대한 서사의 단단한 주춧돌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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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제, SK하이닉스는 '위기 극복'이 아닌 '글로벌 패권 장악'을 위해 다시 한번 태평양을 건넌다. 이번엔 무려 45조 원(약 300억 달러)이라는 경이적인 규모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4일 이사회 결의를 거쳐 ADR의 나스닥 상장 일정을 내달 10일로 잠정 확정했다.

    300억 달러라는 숫자가 가진 무게감은 외환시장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이다. 이는 대한민국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의 1년 치 달러 수요와 맞먹는 액수다. 역대 두 번째로 많은 흑자를 기록했던 지난 4월 경상수지 흑자액(282억 9천만 달러)을 가볍게 뛰어넘고, 지난해 서학개미들이 사들인 전체 달러 매수 규모(500억 달러)의 절반을 상회한다. 만약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수요예측이 흥행 돌풍을 일으킨다면, 최종 조달 규모는 시장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다.

    이 거대한 자금의 종착지는 명확하다. 뉴욕에서 조달한 300억 달러는 고스란히 국내로 유입되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과 청주 P&T7 어드밴스드 패키징 팹의 기계장치 및 시설투자 자금으로 전환된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전쟁의 승기를 굳히기 위한 실탄이 글로벌 시장에서 조달되어 한국 땅에 뿌려지는 것이다.

    이 자금 조달이 반가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현재 고사 직전에 몰린 국내 외환시장에 단비 같은 '구원투수'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외환시장은 과거의 문법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다. '경상수지가 흑자면 환율은 떨어진다'는 백전노장의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경상수지가 역대급 흑자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달러-원 환율은 어느덧 1,550원 선을 위태롭게 바라보고 있다. 국내 증시가 가파르게 오를 때마다 차익실현을 하며 달러를 쥐고 국외로 빠져나가는 외국인 자금의 구조적 이탈을, 단순히 상품을 팔아 벌어들이는 달러(경상수지)만으로는 방어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 탓이다.

    돈이 빠져나가는 구조적 한계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도 판을 바꾸는 달러 펀딩이 필요하다. 외국인이 주식을 팔고 떠난 자리를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기업과 기관들이 직접 해외로 나가 주식이든 채권이든 다양한 형태의 달러를 적극적으로 끌어와야 한다. 자본의 유출을 자본의 유입으로 맞받아치는 역발상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SK하이닉스의 이번 나스닥 ADR 발행은 가뭄 끝에 만난 단비와 같다. 1,500원 중반대에서 고공행진을 이어가며 시장을 짓누르던 달러-원 환율의 우상향 곡선을 꺾어놓을 수 있는 결정적 '게임 체인저'이자 전환점이 될 수 있어서다.

    1985년 유로달러시장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던 대한민국 자본시장은 이제 민간 기업 한 곳이 단숨에 300억 달러를 끌어와 나라의 환율 물길을 바꾸는 서사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글로벌 반도체 영토 확장과 국내 외환시장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겨냥한 SK하이닉스의 대담한 나스닥 행보에 온 시장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달러 펀딩이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이유다. (경제부장)

    sykw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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