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시윤의 각도] 발권국에서 결제국으로
  • 일시 : 2026-06-23 09:07:53
  • [윤시윤의 각도] 발권국에서 결제국으로



    (서울=연합인포맥스) "한국은행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부서는 어디일까요?"

    최근 한국은행 사람들과 식사 자리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오갔다.

    통화정책국이라는 답이 먼저 나올 줄 알았다. 아무래도 중앙은행의 상징은 금리라서다. 아니면 조금 더 근본으로 들어가 발권국일까. 한국은행 하면 여전히 돈을 찍어내는 기관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질문의 답은 하나로 모였다.

    "결제국 아닐까요?"

    사실 이 질문은 한국은행 내부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화두다.

    이승헌 전 한국은행 부총재는 저서 '돈의 변신'에서 1992년 입행 초기 경험을 소개한다. 상사로부터 "한국은행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통화정책이라고 답하려던 순간,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 머뭇거리자 상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결제 업무다."

    이 전 부총재는 당시에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으나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고 적었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은 결국 '결제를 완결시키는 능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현금 없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오래된 질문은 다시 날이 선다.

    커피 한 잔도 휴대전화로, 지갑 없이 외출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한국은행의 '2024년 지급수단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24년 결제 건수 기준 현금 비중은 15.9%에 그쳤다. 대신 신용카드(46.2%), 체크카드(16.4%), 모바일카드(12.9%)가 그 자리를 채웠다. 10년 전인 2013년(41.3%)과 비교하면 현금은 절반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역설도 존재한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폐는 오히려 늘고 있다.

    지난해 말 화폐 발행잔액은 210조6천957억원으로 2024년 말(193조1천520억원)보다 9.1% 증가했다. 5년 전보다 60조원 가까이 불어난 규모다.

    사람들이 현금을 덜 쓴다고 해서 중앙은행의 역할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거래 수단으로서의 현금은 퇴장하고 있지만,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수요는 여전하다. 결제망 바깥에서 조용히 쌓이는 돈이다.

    중앙은행은 돈을 인쇄하는 기관이기 전에 경제 시스템의 최종 결제를 책임지는 기관이다. 금융기관들이 마지막 순간에도 거래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화폐도, 금융시장도, 통화정책도 작동한다.

    최근 한국은행이 공을 들이는 과제들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24시간 외환시장, 원화 국제화, 한은금융망(BOK-Wire+) 고도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연구, 예금토큰 실험이 대표적이다.

    이는 신현송 총재 체제 들어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신 총재는 물가안정에 대해 분명한 메시지를 내는 한편 지급결제 기능을 중앙은행의 핵심 과제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다음 달 초 유럽중앙은행(ECB) 포럼에서 직접 발표할 논문 역시 CBDC와 예금토큰을 활용한 차세대 결제 시스템이 주제다.

    이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국제결제은행(BIS)에서 오랜 기간 지급결제 혁신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신 총재에게 중앙은행은 단순히 금리를 결정하는 기관이 아니다. 돈이 실제로 움직이고 최종 결제가 이뤄지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기관에 가깝다.

    사람들이 지폐를 잘 만지지 않는 시대에 중앙은행은 결제망과 네트워크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금융기관과 시장 참가자들이 안심하고 거래를 끝낼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일이다.

    최근 만난 한 한국은행 주요 관계자도 "역할은 바뀌어도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죠. 화폐가 사라져도 중앙은행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중앙은행의 역사를 길게 바라보면 그 본질은 금리도, 발권도 아닌 신뢰다. 그리고 그 신뢰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돈을 찍어낼 때가 아니라 거래를 끝낼 때다.

    발권국에서 결제국으로.

    신현송 총재가 결제 기능을 전면에 올리고 있는 것은 결국 중앙은행의 본질을 다시 꺼내 드는 작업이다. 금리 결정이 중앙은행의 가장 눈에 띄는 권한이지만, 디지털 화폐와 토큰화, 24시간 외환시장 시대에 그 존재 이유는 서두에서 던진 질문에서 시작한다.

    "한국은행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부서는 어디일까."

    조직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기능이 그 조직의 본질이라면, 질문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경제부 시장팀 차장)

    *출처 : 한국은행 디지털아카이브


    syy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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