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의 글로브] 그린스펀의 서류가방
  • 일시 : 2026-06-19 11:12:40
  • [문정현의 글로브] 그린스펀의 서류가방



    연합뉴스 사진 제공


    (서울=연합인포맥스) "중앙은행가(家)가 된 이후 나는 매우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법을 배웠다. 만약 내가 지나치게 명확하게 말한 것처럼 들린다면, 당신은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당신은 내가 한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이 들은 것이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9년간 미국 연방준비제도를 이끌었던 '연준 마에스트로'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은 모호한 화법을 선호했다.

    그린스펀이 의장으로 취임했을 당시에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후 의결문 발표나 기자회견이 없었고 의사록, FOMC 관련 자료도 공개되지 않았다.

    금리가 변경돼도 명확하게 발표되지 않은 경우도 있어 시장은 공개시장조작 등을 관찰하며 연준의 의도를 추측해야 했다.

    1920∼1944년 영란은행 총재를 지냈던 몬태규 노먼의 말처럼 "설명하지도, 변명하지도 말라(Never Explain, Never Excuse)"는 게 여전히 전반적인 중앙은행 문화였다.

    1994년부터 정책 금리인 연방기금 금리 목표가 발표되기 시작했고 1999년부터 정기적으로 의결문이 발표되기 시작하는 등 연준이 점차 정보 공개와 소통을 늘려가긴 했지만 그린스펀 자신은 명확한 시그널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2001년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연은) 행사 연설문에서 "인간의 본성이란게 그렇듯 우리 대부분은 잠재적으로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정책 아이디어를 내놨다가 전국 TV 방송 앞에서 난처하게 해부당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감스러운 사실은, 가장 효과적인 정책 결정은 언론의 직접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이루어진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정책 입안자들이 단기 목표를 너무 명확히 제시하면 목표 변경이 어려워져 시장·경제 상황에 필요한 조정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우려했다.

    현재와 비교해 현저하게 부족했던 중앙은행 정책 관련 정보와 그린스펀의 모호한 스탠스 때문에 그의 서류가방이 주목받는 웃픈 현상마저 벌어졌다.

    여러 언론의 사진기자들이 FOMC 회의 당일날 연준 건물로 들어가는 그린스펀의 서류가방을 앞다퉈 찍었는데, 시장은 가방의 두께를 보고 금리 결정을 점쳤다.

    가방이 얇으면 별다른 금리 변화가 없고, 반대로 두꺼우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금리 변경을 뒷받침하기 위한 많은 자료를 넣다보면 가방이 뚱뚱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논리였다.

    경제 매체 CNBC의 앵커는 'Briefcase Indicator(서류가방 지표)'라는 이름 하에 가방 두께를 해석했고, CNNfn은 'Eyes on the Fed(연준 시선집중)' 코너를 운영하며 서류가방 사진을 실시간으로 올렸다.

    세인트루이스 연은은 2000년 7월 "안타깝게도 페드워처들에게 서류가방 크기는 연준 행동을 예측하는데 좋은 지표가 아니다"라는 진지한(?) 논문을 내기도 했다. 연은은 실제 2000년 5월 FOMC 회의날 아침 언론들이 '수년만에 가장 얇은 서류가방'이라고 보도했는데 결과는 50bp 금리 인상이었다며 "5년 만에 가장 큰 폭의 인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가방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의 종류와 질"이라고 근엄하게 지적했다.

    퇴임 후 그린스펀은 서류가방 두께에 대한 관심이 의아했었다는 듯이 "아내가 점심을 싸줬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출처: 엑스(X)


    이후 벤 버냉키 전 의장이 정례 기자회견과 점도표를 도입하면서 연준의 커뮤니케이션은 전환기를 맞는다. 금융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금융기관과 상품이 다양해지면서 통화정책이 실물경제에 파급되는 경로가 복잡해진 가운데, 통화정책의 내용과 의도를 분명하게 알려 시장 참가자들이 중앙은행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투자와 소비 등 경제가 바뀌기 때문에 연준은 이 기대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버냉키 후임인 재닛 옐런, 제롬 파월 전 의장도 소통에서 같은 노선을 밟거나 더욱 확장시켰다. 파월은 2019년부터 매 회의마다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랬던 연준이 이제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케빈 워시 새 연준 의장이 첫 회의 때부터 소통 체계 대개편을 예고하면서다.

    연준은 이달 의결문에서 선제안내(포워드 가이던스)를 제외했고, 워시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점도표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점도표 도입 이래 의장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문가들은 워시 체제에서 점도표가 결국 폐지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워시는 기자회견에서 커뮤니케이션, 대차대조표, 데이터, 생산성과 고용, 인플레이션 정책 체계 등을 검토하는 TF를 만들어 연말까지 결론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워시는 앞서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도 "나는 포워드 가이던스를 믿지 않는다. 미래의 결정이 무엇인지 미리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연준은 회의서 안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현 소통 체계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드러냈다.

    필라델피아 연은에서 경제자문을 지냈던 루크 틸리는 "우리는 다시 그린스펀 시절과 비슷한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며 "'그가 서류가방을 들고 있는가 아닌가?'와 같은 질문이 나오는 시기 말이다"라고 말했다.

    워시의 실험이 연준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지는 솔직히 알 수 없다. 일단 점도표만 놓고보면 '과잉 정보다', '정책을 지나치게 경로화한다'는 이유로 과거에도 무용론이 불쑥불쑥 제기되곤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올해부터 K-점도표를 냈는데, 점도표와 의사록이 온도차를 보이는 일이 벌써 발생하고 있다. 점도표는 금리 인상을 시사했으나 의사록에서는 인상 속도 가속을 주장하는 위원의 의견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평가다.

    반면 또 다른 일각에서는 소통의 공백이 시장의 과소·과잉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기도 한다.

    소통을 줄이려는 워시의 계획이 현실화한다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확실성과 시장 변동성'은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린스펀의 서류가방을 뚫어지게 보던 시장은 이제 워시의 무엇을 보게 될까. (국제경제부장)

    jhm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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